김대중 DMZ 기록화연구회 워크숍 행사개요
일시 : 1월 12일 (토) 오후 2시 ∼ 6시
장소 : 한국외대 (이문동) 교수회관 세미나실
축사 : 이해동 목사(전 사단법인 ‘행동하는 양심’ 이사장)
강연 : ‘김대중과 빌리 브란트 : 햇볕정책과 동방정책’
최영태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요약문 작성자 : 한국 조사기자협회장, YTN 아카이브 유영식 부장
강연 이후 일본 NHK 제작, 김대중 전기 2편 시청
(경어체를 생략하고, 짧게 내용을 전달하기로 합니다. 내용이 다소 어려워 정확한 녹취가 안되어 있으니, 자세한 강연내용은 발표논문을 참고하심 큰 도움이 됩니다)
최영태 = 이해동 목사와 부인께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해서 기쁘고 고맙다. 김대중과 관련해서 논문을 쓴 배경은 (어린 시절) 김대중의 3선 개헌 반대 연설에 빠지면서 시작되었다.
5·18과 한국현대사를 연구를 하면서 한국현대사에 김대중이 큰 영향을 미치었고, 한국현대사가 바로 잡히게 되는 것에 대해 김대중을 빼놓을수가 없다. 김대중과 5.18을 연결시키는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일부 진보학자도 있었다.
독일의 통일 문제는 분단의 고통을 완화하고 공존공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교류와 협력, 민족 동질성을 유지하는 것이 독일 통일의 절반이라고 했다. 1단계로 동방정책, 절반의 통일이며, 2단계는 실질적 독일 통일 단계, 3단계는 내적 통일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빌리 브란트와 김대중의 삶은 매우 비슷한 점이 많다. 그래서 아웃사이더의 성공적 삶 (두 거장의 이야기)를 오늘 여러분께 하려 한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김대중의 햇볕정책을 연구한 논문은 많다. 그러나 두 개의 정책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피는 연구는 많지 않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1960년대 말부터 동방정책을 이야기하고, 1970년대 윤곽이 완성되었다고 본다.
빌리 브란트와 김대중 .. 아웃사이더의 성공적 삶
빌리 브란트는 30대에 사생아라는 것을 알게 되고, 외할아버지가 자기 친딸이 아닌 빌리 브란트의 어머니를 받아들인 불행한 가족사를 가졌다. 고등학교 때 히틀러 반대운동으로 노르웨이로 망명을 가게 되며, 1933년부터 독일인이면서 노르웨이인인 이중국적으로 산다. 대학졸업장이 없는 유일한 수상이었고, 독서를 가장 많이 한 수상이었고, 저술을 가장 많이 한 수상이었다. 브란트는 삶에서 여행을 많이 간 것으로 유명하다. 힘들 때면 여행 속에서 탈출구와 새로움을 추구했다고 한다. 세계인으로서 브란트가 빛이 나는 것이기도 하다. 사민당의
노선의 불만으로 급진좌파당에 가입하게 되나, 소련 공산당의 경직성, 스페인 공산당의 종속성을 보며 사회민주주의로 되돌아오게 된다.
1945년 전쟁이 끝났는데, 48년까지 노르웨이에서 일하게 되는데, 브란트의 정치 정적들은 적국의 군복을 입고, 조국과 싸운 민족반역자라고 몰아 세우기도 했다. 브란트는 죽음 앞에서 독일인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았고, 난 세계인으로 중요하다고 했다. 젊은 시절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삶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독일의 변방 아웃사이더로 살게 되었다.
브란트의 여성 편력 (4번의 결혼)은 여러 이유가 있다. 외모가 뛰어나고, 사생아로서 삶의 신비스러움이 여성들의 접근이 많았고, 여성에게서 심리적 피난처를 찾으려는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여성편력은 브란트가 그가 가까이한 여성중에 동독의 스파이가 있다고 정적들의 위협을 받으면서 결국 수상직을 사직하기도 한다.
한편, 김대중은 서자로 태어나서 어린 시절 괄시를 받고 컸다. 어머니의 삶의 고단함도 있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으로 대학을 가지 못한 것은 학력 콤플렉스로 작용했다. 브란트가 고등학교 수상, 김대중은 고등학교 대통령이었다. 김대중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독서를 많이 하고, 저술 활동을 많이 한 사람, 지역적 학력적 콤플렉스를 가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김대중은 출발 과정이 아주 진보적인 사람이였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못하는 척박한 한국 땅에서 명확하게 좌파와 선을 긋고,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서생적 문제의식 (진보 표방), 상인적 현실감각 (절제)”이 잘 표현하는 것이다. 미국의 민주당 정도의 진보노선을 표방했다고 할 수 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김대중의 햇볕정책
“독일의 평화이면서 세계의 평화, 유럽 평화속의 독일의 통일” .. 브란트의 동방정책
“동북아 평화속의 한반도 평화, 한반도 평화는 동북아에 안정에 기여한다” .. 김대중의 햇볕정책
김대중은 14번째 추천된 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987년 추천이 처음이었는데, 빌리 브란트는 사민당 총재로서 국회의원 50여명의 추천을 받아서 그를 노벨상 후보로 추천하게 된 것이다. 1980년에 유럽 정치인중 브란트가 가장 앞장서서 구명운동을 나섰다. 개인적 삶, 정치적 삶은 두 사람이 유사하다. 김대중이 브란트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은 것이다.
브란트는 할슈타인 정책을 무력화시켰다. 동독을 사실상의 국가로 인정하도록 했다. 브란트는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는 것을 보며, 국제정치의 냉혹함을 알게 되었다. 브란트는 독일이 서로 교류하고 나머지 통일은 역사에 맡기자고 했다. 유럽의 평화 속에서 독일의 통일이 가능하고, 독일의 통일은 유럽의 평화에 기여하며, 독일의 통일은 유럽의 통일에 기여한다고 했다.
김대중은 1960년대 후반에 서독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외교정책의 전향을 주장하게 된다.
1971년 대통령선거연설에서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지지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1971년도 4대국 보장론(한반도의 평화 보장, 남북통일 논의 제안)은 브란트의 유럽속의 독일 통일 정책과 유사하다. 동북아 평화속의 한반도 평화, 한반도 평화는 4대국(미국,일본,중국,러시아)의 인정을 받아, 동북아에 안정을 한다는 것은 브란트의 유럽 평화속의 독일정책과 유사하다는 생각이다.
김대중에게 독서는 위기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였나 싶다. 독서를 통해 위안과 비전을 찾고 위로를 받지 않았나 싶다. 그는 3대 신앙으로 국민에 대한 믿음, 역사에 대한 믿음, 하느님에 대한 믿음, 숱한 고난을 이겨낸 것에 대한 것도 그 믿음이 있었다.
김대중은 독일통일을 보면서 한반도는 독일처럼 통일되면 안 된다고 했다. 그렇지만 김대중의 측근들조차 햇볕정책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못했고,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 않았다. 햇볕정책은 충분한 국민적 동의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정권은 햇볕정책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계승이 되었더라면 어떠했을지 아쉽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엄청난 저항을 받았다는 것을 잘 모른다. 동방정책을 지키기 위해서 국회의원을 돈으로 매수하기까지 했다. 동독 스파이사건으로 사임하면서 야당과 언론은 동방정책과 브란트를 조소하기도 했다. 기민당의 콜은 브란트 동방정책을 반대했었지만, 1982년 집권하면서 그 동방정책을 착실히 계승하게 되었다. 절반적 통일에서 점진적 흡수통일, 그러나 독일의 통일이라는 역사를 거스를 수가 없었다. 브란트도 흡수통일에 찬성하게 된다.
브란트와 김대중은 아웃사이더로서 그 상황을 극복하고,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을 많이 언급하는데, 적절한 시련이 운명을 강하게 한다. 불우한 삶에 억눌려서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는 모습을 보면 도전과 응전의 두 거장의 브란트와 김대중은 그 나라의 민주주의, 세계인류 보편적 가치에 기여하지 않았나 싶다. 김대중의 삶과 사상을 전달하고, 국민들이 역사가 삶과 행적을 기억하고 미래비전을 삼는다면, 김대중의 3대 신앙을 실천하는 것으로 오늘 강연 마친다.
지정토론 : 박상준 한국외대 정치학 박사
= 김대중 대통령의 사상적 기반은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 두 개로 요약된다. 한국사를 관통하면서 중도라는 것, 김대중의 사상적 기반에 대해서 논의가 활성화되길 바란다. 중도는 하나의 원칙을 가지고, 좌우합작을 논의하는데, 중앙에 있는 무리라고 실용주의 타협주의라고 중앙에서 좌우합작은 굳건한 원칙이 있었는데, 김대중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서구식 개념으로 봤을 때는 자유민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질적이면서 결합되어 있지 않은가 싶다.
두 번째는 국제정치, 유럽정치를 연구해보면 햇볕정책 이전에 북방정책이라는 것도 있다. 노태우가 북방정책 중국과의 수교, 소련과의 수교,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한민족 공동체통일방안을 보면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차용하지 않았는지 싶다.
남북관계에서 보면, 동방정책, 북방정책의 동일성, 북한을 대하는 태도, 기본적인 콘셉트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시대 변화속에서 나타나는 햇볕정책과 유럽공동선언 독특성, 차별성을 부각시키지 않으면 묻혀 버릴수 있다는 것, 원형적인 이전 정책과 다름을 명확히 차별화시키지 못하면 연속성만 강조하게 되는데, 분명히 차별성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논의자체가 파편적으로 동시에 거론되고 동시에 비판적으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콜은 동방정책 계승하면서 특사를 계속 활용했는데, 우리나라는 네트워크가 단절되는 경우가 있었고, 이명박 박근혜가 어떠한 채널도 가동되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점이다. 한국의 남북관계에 이러한 네트워크 자체는 유지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김대중은 통일 이야기를 많이 했고, 평화통일을 강조했다. 노무현 문재인은 통일보다는 평화를 많이 얘기했다. 사실 그렇게 다르지 않구나, 통일은 장기적인 계획이 되기 위해서는 평화, 선민주 후통일의 과정에 대한 일반적으로 통일 얘기를 했을 때 오해를 살 수도 있겠다. 햇볕정책과 6.15공동선언, 북방정책이 다름과 있지 않을까 싶다.
최영태 답변 = 브란트 사민주의 김대중 민족주의 자유주의가 아닌가 한다. 자유주의란 것이 시대에 따른 다양성을 가지는데, 오늘날 보수주의는 자유주의의 계승이라고 보는데, 자유주의의 가치가 보수주의의 가치와 일맥상통하다. 김대중의 이념적 지형을 보면 자유주의에 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진보적 색깔이 많이 가미되어 있다. 정치적 노선이 건준과 신민당에 있었고, 대중경제론도 한국적 상황속에서 유럽식의 사민주의가 가미되어 있다. 그래서 단순한 넓은 자유주의라고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동방정책과 북방정책이 먼저가 아닌가. 이전 정부가 동독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었고, 역사가들은 그때의 정책을 동방정책이라고 부르고,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신동방정책으로 세분화하기도 한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표준어로 써버리고 있지만. 노태우시대의 북방정책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남북기본합의서를 그대로 담는 것으로서, 보수층을 설득하기 위해 노태우의 남북기본합의서는 박정희의 7.4공동성명까지도 끌어왔다.
정책의 진정성과 명확한 철학이 있어야 하는데, 노태우시대와 김대중의 대화제의가 다를 수 밖에 없다고 본다. 남북관계는 명확한 철학이 없으면, 정치인이 어떤 주장을 펼쳐야 하는지 봐야한다. 노무현의 대북정책은 높이 평가할 수 없다. 김대중의 대북정책을 계승했다고 했으나 명확한 철학이 없었다. 대북송금 특검은 남북화해협력단 전체를 구속시킨 것이다. 햇볕정책의 수정을 가했고, 노무현 정부가 대북관계를 정체시킨 책임이 있다. 계속해서 중단없이 계속되었다면, 이명박 정부가 쉽게 무너뜨리지 못했을 것이다. 남북화해협력정책은 이해하지만, 확고한 생명을 걸고 추진했던 철학이 없었으니깐, 어려움이 닥치면 쉽게 무너지지 않았나 싶다.
(플로어 질문) 햇볕정책을 국제정치 내에서 어떻게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까. 핵을 가진 북한과 평화교류, 안보의 리스크, 이념을 떠나서,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정책을 개발해야 할지, 달라진 상황에 맞춰서 연구를 지속해온 최 교수의 견해를 듣고 싶다.
최영태 답변 = 긍정적 부정적 측면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데, 불리한 측면은 6.25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대립구도가 강하다는 것이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두 번째는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강화되는 것이 좌표설정이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의 경우는 독일처럼 활발한 교류가 불가능하고, 성급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북한은 많은 사람을 보내지 못한다. 점진적으로 관광산업을 진흥하고, 한민족이라는 것을 동질성을 유지하고, 상호 방문하게 해야 하며, 절대 조급하게 해서는 안된다.
핵보유는 북한의 약점 감추기다. 중국과 러시아도 못 믿는 것이다. 중국과 구소련이 북한을 배신한 것이다. 중국과 소련이 남한과 수교를 하면서, 균형이 깨진 것이다. 중국과 북한은 혈맹이라고 하면서 경제교류는 남한과 활발하게 하고 있다. 재래식 무기로는 군비경쟁이 안돼고, 극약처방이 핵무기라는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북한의 열세를 감추기 위함이다.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과 북한이 수교하고, 남북은 서로 교류하고, 북한은 핵 폐기하고 (지금은 핵무기 동결)하고, 점진적 폐기로 가야 한반도 평화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긍정적 측면은 금강산관광, 개성공단은 장기적 기여 방식이다. 김대중의 햇볕정책은 북한의 기간산업에 투자하는 것이다. 북한의 기간산업투자, 철도개선 사업 등은 당장 북한이 망하더라도 바로 살아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햇볕정책은 장기적 투자인데, 제대로 설명을 못하고 있다. 우리는 북한과 통일해야 한다는 정서적 통일감이 있다. 한반도기로 함께했다는 것 제3의 코리아 색깔이 넘쳐나야 한다. 남한과 북한이 제3의 코리아 팀을 확대시켜 나가야한다.
정치적으로 분단되었다고 하더라도, 제3의 코리아 방식으로 남북이 하나되기 위해 노력한다
면, 언제가 되었든 공존공동한다면 독일보다 수월하지 않겠는가. 비관주의에 빠지는데, 긍정적인 측면을 계속 살리고 확대시켜야하지 않겠는가.
2019-01-16 11:25
기록물ID:RSC_DC1_2019_김대중DMZ기록화연구회 워크숍 행사개요
기록물유형:
기록생산자:
생산일자:
내용요약:
자료출처:
언어:
규모와범위:
장소:
인물:
기관및조직:
키워드: